"좋은 곳은 풍경 때문에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 때문에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된다."
사람들은 여행을 다녀오면 무엇을 기억할까요?
누군가는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입안을 즐겁게 했던 맛있는 음식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 가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람’입니다.
부산 기장에서 보낸 몇 년의 시간은 제게 잊을 수 없는 바다의 맛도 선물해 주었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정겨운 인연을 남겨 주었습니다.
송정으로 가는 길, 그리고 입안 가득 감돌던 기장의 맛
기장에서 살던 시절, 답답한 마음을 달래거나 가족들과 바람을 쐬고 싶을 때면 차를 타고 송정 해변 쪽으로 자주 나갔습니다. 그 드라이브 길에서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어부밥상’이었습니다.

"접시를 가득 채운 생선구이와 푸짐한 반찬. 어부밥상의 압도적인 비주얼은 기장의 정과 바다의 온기가 담긴 잊을 수 없는 한 상이었습니다." / ※ 이해를 돕기 위해 연출된 이미지입니다.
그곳의 생선구이는 정말 특별했습니다. 싱싱한 바다의 맛을 진하게 구워 내오는 그 온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손님이 너무 많아져 더 큰 곳으로 이전했고, 지금까지도 손님들이 줄을 선다는 아들의 말에 옛 친구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처럼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기장 생활은 늘 입을 즐겁게 하는 소중한 단골 식당들과 함께였습니다. 정갈한 한 상 차림이 일품이었던 풍원장, 시원하고 매콤한 육수가 생각날 때 들르던 유명 밀면집, 그리고 일광 바다 해안도로를 따라 즐기던 맛있는 음식들까지...
짚불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던 짚불장어, 부산 사람들의 영혼이 담긴 꼼장어, 그리고 뼈째 고소하게 씹히던 잊지 못할 아나고 세꼬시의 추억은 지금도 아련합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지만, 추억은 마음을 채운다."
그때 비로소 이 말의 진짜 의미를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비둘기공원의 온기와 가마솥복어집에서 시작된 인연
기장은 제게 가슴 따뜻한 가족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세 아이들이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조용히 걸었던 비둘기공원의 산책길은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지는 정겨운 풍경입니다. 할아버지와 손주들이 나누던 온기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그 길에 남아있는 듯합니다.

"세 아이들의 손을 꼭 잡으셨던 외할아버지. 비둘기공원의 산책길엔 할아버지와 손주들이 나누던 온기와 웃음소리가 녹아있습니다."/출처:Pexels
그리고 그 비둘기공원 근처에서 소중한 인연 하나가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제 가슴속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가마솥복어집’입니다.
가마솥복어집 아드님은 우리 첫째 아들과 어릴 때부터 함께 뛰어놀던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처음 비둘기공원 근처에서 작은 가게로 시작해, 기장초등학교 쪽으로 이전하며 손님이 늘어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이 땀 흘려 결실을 맺고 잘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가슴 따뜻한 일입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아들은 얼마 전 그 친구가 지금은 홍콩에서 양식 관련 일을 하며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어릴 적 골목을 누비던 아이가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다니 참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2023년 12월16일 폭설, 하얗게 빛난 진정한 의리
2023년 12월16일, 충북 진천에서 우리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하필 그날은 눈앞이 가려질 정도로 유난히 큰 폭설이 내렸습니다.

도로는 이미 빙판길이 되어 차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고, '과연 하객분들이 무사히 오실 수 있을까' 걱정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눈발을 헤치고 들어오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습니다.
바로 기장에서 함께 자랐던 가마솥복어집의 그 친구였습니다.
부산에서 진천까지, 그것도 차 바퀴가 굴러가기 힘든 극심한 폭설을 뚫고 멀리서 축하해 주기 위해 달려와 준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왈칵 고마움과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먼 길을 찾아와 준 그 마음. 세상 그 어떤 축하보다 더 크고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기장이 내게 남겨 준 가장 소중한 유산
돌아보면 기장은 제 삶에 참 많은 양분을 주었습니다.
대변항의 활기찬 에너지와 멸치축제의 함성
쫄깃하고 진한 기장 미역과 멸치의 풍미
어부밥상, 풍원장, 유명 밀면집의 정겨운 맛
일광 바다의 장어와 아나고 세꼬시 향기
우리 세 아이들이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걸었던 비둘기공원 산책
추억그리고 가마솥복어집으로 이어진 단단한 사람과의 인연까지...

자연이 허락한 그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야말로 15.5 Table이 추구하는 정직한 맛의 근원입니다/출처: Pexels
지금은 음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문득 기장을 떠올리면 맛있는 음식보다 먼저 따뜻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정겨운 시장 상인들의 미소, 반갑게 인사하던 이웃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던 친구들.
결국 인생이라는 길고 긴 여행에서 마지막까지 가슴에 남아 빛나는 것은 화려한 경치도, 맛있는 음식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따라 기장의 푸른 바다 향기와 함께, 그곳에서 만난 고마운 얼굴들이 참 많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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