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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 2편: 필리핀 산악도시 바기오에서 마주한 뜻밖의 풍경

오늘도그로우 2026. 7. 17. 08:17

 

1989년, 긴 여정 끝에 필리핀 북부의 산악도시 바기오에 도착했습니다. 마닐라에서 지프니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달렸고, 캐논 로드 중간에서는 엔진이 멈춰 모두 함께 차를 밀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바기오는 내가 상상했던 필리핀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공기가 달랐습니다. 마닐라의 후덥지근한 공기와 달리 바기오는 선선했고, 오히려 긴팔 옷이 생각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필리핀에 벽난로가 있다고?'

 

 바기오 게스트하우스의 따뜻한 벽난로 전경 (출처: 생성형 AI 이미지)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난로였습니다. 장작이 타오르며 방 안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습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필리핀에 벽난로가 있다고?'

 

머릿속의 필리핀은 늘 덥고 습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바기오는 해발 1,500m가 넘는 고산도시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필리핀 사람들에게도 바기오는 한 번쯤 꼭 와보고 싶은 최고의 피서지였습니다.

 

 

장작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던 때였습니다. 겨울이면 가마솥에 소여물을 끓이기 위해 아궁이에 장작을 넣곤 했습니다.

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밀어 넣고, 두 손을 불 가까이에 내밀어 추위를 녹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불은 단순히 따뜻한 온기만을 주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여러 기억이 함께 담겨 있는 불이었습니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필리핀 바기오에서 장작불을 바라보는데, 문득 고향의 겨울이 떠올랐습니다.

 

불은 사람의 몸만 데우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기억까지 데워 준다는 것을 그날 처음 느꼈습니다.

 

내가 살던 시골보다 더 잘 정돈된 도시

 

캠프존헤이소나무(출처:Pexels)

 

 

 

다음 날 바기오를 둘러보며 또 한 번 놀랐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필리핀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어디를 가도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특히 캠프 존 헤이(Camp John Hay)의 쭉쭉 뻗은 소나무들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당시의 바기오는 내가 살던 시골보다도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필리핀은 덥고 가난한 나라일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은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와서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습니다.

 

대학원 캠퍼스에서 느낀 새로운 세상

 

필리핀대학교캠퍼스나무(출처:Pexels)

 

 

대학원 캠퍼스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학교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소나무가 캠퍼스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교수님들의 사택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좋았습니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필리핀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는 모습도 신기했습니다.

 

 

그때는 아직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입학 등록을 준비하는 약 4개월 동안은 학교 밖에서 방을 구해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필리핀이니까 월세도 저렴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월세는 생각보다 비쌌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기오는 필리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였고, 외국인 유학생도 많아 집값과 월세가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때 또 하나를 배웠습니다. 사람도, 나라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긴 하루의 끝, 그리고 시작

 

바기오의밤전경 (출처:Pexels)

 

 

그날 밤, 선배와 나는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마닐라에서부터 이어진 긴 여정에 둘 다 지쳐 있었습니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누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벽난로의 장작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낯선 나라였지만 그 따뜻한 불기운 덕분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습니다.

 

 

며칠 뒤 입학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첫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교수님은 텍사스 출신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업은 시작되었지만 한 시간 동안 교수님의 영어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강의실을 나오며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습니다.

'이러다 낙제하면 어떻게 하지?'

그것이 내 바기오 대학원 생활의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오늘의 한 줄

세상은 직접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사람은 직접 부딪쳐 보기 전에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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